10/21 노인들도 외출하고 싶다
5년 전 중풍에 걸려 왼쪽 팔·다리를 제대로 못 쓰는 박동신(61)씨는 17일 아침 불편한 몸을 이끌고 경기도 화성의 집을 나서 서울 종로4가 종묘공원을 찾았다.
외로움을 달래려 매일 다니는 이 길은 2시간이 꼬박 걸리는 ‘여정(旅程)’이다.
박씨는 수원역으로 가는 아파트 셔틀버스 정거장 앞으로 일찌감치 나왔다.
“버스 안에 경로석은 있지만 그냥 타는 순서대로 앉는 거잖아.
뭐라 말하기도 남 부끄러우니 서두를 수밖에.
”국철 구간 중 가파르기로 이름난 수원역 계단 앞에서 또다시 한숨이 났다.
“몸이 안 좋을 때면 에스컬레이터 타기도 힘들어 ‘승강기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허튼’ 생각도 하지.
” 박씨는 서초역 인근 한의원에서 중풍 통원치료를 받는다.
“그곳엔 지하철 엘리베이터가 있으니 승강기도 돈 따라 가는 모양이야. 잘 사는 동네 말고 노인네 많이 다니는 역에 엘리베이터를 달아주면 얼마나 좋아.
나이 들어 머물 곳은 꼭 안방과 집 근처여야 하는가.
손자 재롱을 보려 해도, 노인정 친구들과 가까운 여행을 떠나려 해도,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려 해도, 육교 계단은 가파르고 버스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17일 오전 서울 지하철 동대문운동장역 환승장.
10년 전 심장판막수술을 받은 김정례(가명·여·62)씨가 가쁜 숨을 내쉬며 무거운 걸음을 떼고 있었다.
걷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 김씨의 손가방 때문에 왼쪽 팔뚝이 자꾸만 땅으로 흘러 내렸다.
열 발자국쯤 뗀 뒤 벽을 짚고 잠시 쉬고 다시 걷기를 반복하는 김 씨.
천호동 집에서 동대문 국립의료원까지 약을 타러 매주 두 번 다니는 길이 익숙할 만도 하지만, 지하철 계단을 오르는 얼굴엔 핏기가 가셨다.
“역이 너무 넓어 가슴에 단 박동 보조기가 ‘찌릿찌릿’ 속을 파고들어.
제 밥벌이도 바쁜 자식들이 같이 다닐 수도 없고, 살아 짐 되는 것도 싫은데 왜 이리 나다니기 힘든지….
같은 날 종묘공원.
6개월 전 남편과 사별한 임희순(85)씨는 매일 이 곳에서 추억에 젖는다.
“둘이 손을 꼭 붙잡고 나오던 곳이야.
남들이 ‘팔순 넘은 노인네들이 주책’이라고 수군거렸어도 부러운 눈치였지.
외로운 노인네들 보러 분당 집에서 오는 건데, 버스는 도망가고 지하철은 오르내리기 힘들어 숨 가쁘고 뒷골이 당겨.
노인들은 ‘나이’를 배려하지 않는 사회 시스템에서 우울함을 더한다.
관절염을 앓고 있는 이희자(74·여)씨는 “노인들은 올라가는 것도 힘들지만 다리 힘이 없어 내려갈 때가 더 힘든데, 에스컬레이터를 아예 정지시키거나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만 가동하는 경우가 많다”며 “물자 절약도 필요하지만, 공공 장소의 리프트나 에스컬레이터는 노인들 필요에 따라 융통성 있게 가동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한노인회 김정호 사무총장은 “지하철은 계단 오르내리기 힘들고, 버스는 쫓아가도 떠나 버려 ‘거리에선 감옥에 갇힌 것 같다’고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며 “노인들의 경험과 노동력을 존중해 주고, ‘노인문화’를 함께 만들려는 모두의 노력이 진정한 ‘장수(長壽) 사회’를 만든다”고 말했다.
김 사무총장은 “무료급식소나 종묘공원에서 낮 시간을 허송하는 이들이 많지만 서로 불평만 늘어 놓고 싸우기도 한다”며 “젊은 사람들이 작은 불편도 덜어주려는 마음을 갖고, 정부와 시민이 함께 나서 노인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놀이·휴식 공간을 확충해야 한다”고 했다.
대한노인복지회 오장경 사무총장은 “고속도로 휴게소를 비롯한 공공장소나 식당·화장실 문을 미닫이나 자동문으로 만들고 손잡이도 알맞은 위치에 두는 등 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아쉽다”며 “역·터미널·병원의 대기장소에도 경로석을 놓아 노인들이 사람 많은 곳에 불편 없이 드나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마른 운전자들의 위협 때문에 노인들은 길에서도 불안하다.
지난해 교통사고 사망자 중 61세 이상 노인은 2043명으로, 전체 교통사고 사망자(8097명) 중 25.2%를 차지했다.
교통사고로 하루 평균 5.6명이 숨지고, 73명이 부상한 것으로 최근 시민단체 ‘바른 운전자들의 모임’이 발표했다.
폭 32m 도로의 횡단보도를 건너는 시간은 20대가 평균 22.5초, 70대가 30.1초 걸린다.
그러나 현행 보행자 녹색신호 기준은 일률적으로 32초 수준.
전문가들은 “병원·복지시설 등 노인 관계기관이 집중된 곳에는 보행신호의 길이를 보다 유연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남은 시간이 표시되는 횡단보도 녹색 신호등도 확대 설치해 노인들이 무리하게 보행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박상철 서울대 의대 교수는 “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해지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며, 그런 의미에서 노인들은 ‘후천적 장애’를 겪고 있다고 할 수 있다”며, “관공서는 물론, 백화점·병원·전시장 등에도 노인들을 배려한 리프트나 에스컬레이터 설치를 제도화해 그들에게 자유로운 이동권을 보장해 주는 것이 정부의 의무”라고 말했다.(조선일보 2002-10-18 秦聖昊기자)
2002-10-21 10:35:31

